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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스님─ 금오선사의 기도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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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불사 댓글 0건 조회 1,098회 작성일 14-06-0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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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선사의 기도 성취

현대의 대선사 금오(金烏, 1896-1968) 스님이 젊었을 때인 1920년대 초기,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인 수월(水月)스님을 뵙고 지도를 받기 위해 만주 봉천으로 향했다. 그런데 조선 땅과 만주 땅과 러시아 땅이 합해지는 회령 지방을 조금 지나 막 러시아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마적 떼들이 어느 부잣집을 털다가 반항하는 주인을 죽인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부잣집 안 주인은 제정신이 아니었고, 범인 검거에 혈안이 되어 있던 러시아 경찰들은 불심검문을 하다가 장비처럼 생긴 금오스님을 체포하여 그 부인에게 보였다. "이 사람이 그 마적 떼요?" "그런 것 같아요, 마적 떼 대장과 비슷하게 생겼어요."

정신이 반쯤 나간 그 부인의 말 한마디에 금오스님은 완전히 범인으로 몰려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고문을 당하면서 자백을 강요받았다. "나는 수도하는 승려이지 마적 떼가 아닙니다." 그러나 러시아 경찰은 믿지 않고 밤낮없이 고문을 계속하였다.

그러더니 며칠이 지나자 고문을 중단하고 감옥에만 가두어 놓는 것이었다. '웬일일까? 고문도 그만두고 감옥에만 가두어 두다니..' 이렇게 고민을 하면서 지내던 어느 날, 한국인 한 명이 그 감방에 들어왔다. 학교 선생인 그는 산골짜기에 아편을 심었다가 발각되어 잡혀 온 것이라고 하면서 물었다. "스님이 살인 강도의 누명을 쓰고 들어온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스님, 범인은 이미 잡혔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석방시켜 주지 않는 거요?" "아마, 이 감옥에서 나가기가 어려울 걸요?" "왜요?" "우선 조선 사람은 나라가 없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힘을 써 주지 않습니다.

설사 러시아 쪽에서 풀어 준다고 하더라도, 조선 사람이 러시아 감방에서 죄없이 갇혀 있었다는 것을 구실로 일본은 러시아에 보상을 요구합니다. 러시아로서는 공연한 말썽거리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으므로, 차라리 감옥에서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보복을 두려워한 그 부잣집 안주인이 돈을 써서 스님을 풀어 주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큰일났구나.
이 감옥에서 살다가 죽어야 하다니! 이토록 난감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 있는가?
필경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탈출을 하는 수밖에는 딴 도리가 없겠구나.' 금오스님은 감옥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했다. 참선도 화두도 그만두고 오로지 관세음보살의 구원만을 갈구하며 부지런히 염불하였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어떤 사람이 철창 바깥에 나타나 감방 안을 들여다보며 주위를 살피는 것이었다.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쇠창살 두 개를 잡고 쑥 뽑아 올리자, 쇠창살이 그대로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뽑힌 쇠창살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어 스님을 향해 '씩 -' 웃고는, 다시 쇠창살을 꼿아 놓고 사라졌다. 비몽사몽간에 이 일을 접한 금오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데 쇠창살 두 개를 뽑아 보았다. 이상하게도 쇠창살이 쏙 뽑히는 것이었다.

스님은 감방을 빠져나와 형무소 문 쪽으로 다가갔고, 때마침 문지기들이 졸고 있어 몰래 기어 나올 수 있었다. 이렇게 완전히 형무소를 탈출하여 달려가다가 다리가 아파 수수밭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말을 탄 간수들이 나타나 탈옥수를 찾는 수색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스님이 다시 안전한 곳을 찾아 피해 가는데, 한 간수가 말을 몰아 쫓아오더니 잡으려고는 하지 않고 묻기만 하는 것이었다.

"탈옥수 한 명이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소?" "보지 못했는데요." "이상하다. 어디로 사라졌지?"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관세음보살의 가피로구나.' 스님은 불보살님의 은혜에 크게 감격하면서, 만주 봉천의 깊은 산림 속 토굴에 계신 수월스님을 찾아가, 1년 동안 모시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금오스님은 후일 후학들을 지도하면서 그때의 일을 자주 들려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참선하는 수좌도 가끔은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이 금오스님의 말씀처럼 참선 수행자도 장애가 있으면 한바탕 기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도를 하면서 원(願)을 새롭게 가꾸고, 가피를 입을 일이 있으면 가피를 받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한 번의 기도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도심(道心)에 걸림이 없을 때까지 거듭거듭 행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갈등이 있으면 기도하라. 장애가 많고 공부가 잘 되지 않으면 기도를 통하여 거듭거듭 발심하라. 불보살님께서는 틀림없이 큰 힘을 주실 것이다.

- 낙산사 관세음보살과 의상대사

의상대사(625~702)는 원효대사와 함께 신라때 가장 존경을 받았던 유명한 고승이다 그는 문무왕(文武王) 원년(661)에 불법을 배우고자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많은것을 깨닫고 670년에 귀국한 분이다

그는 귀국 후 관세음보살님이 머물고 계신다는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落山寺)앞 바닷가로 가서 목욕 재계하고 절벽에 있는 굴 입구를 향하여 7일 동안 정성스럽게 관세음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한 기도를 올렸다
7일째 되는날 새벽 이제 관세음보살님께서 강림 하실 때가 되었음을 느낀 의상대사는 기도할 때 깔고 앉았던 방석을 물 위에 뛰우자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들이 나타나 의상대사를 굴 속으로 인도 하였다 텅 빈 굴 안에서 의상대사는 공중을 향해 합장을 하고 절을 하였다

어쩐 일인지 관세음 보살님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수정염주 한 벌만 하사 하였다 의상대사가 수정염주를 받아 가지고 굴 밖으로 나오려는데 동해의 용이 나타나 여의보주 한개를 바치는 것이었다 의상대사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다. 아! 나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구나.

의상대사는 다시 7일을 더 기도한 뒤 또 굴 안으로 들어가 3일 동안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자 기도했다 .그러자 드디어 관세음보살님께서 모습을 드러내고 서 의상대사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그대가 서 있는 곳 바로 위 산 꼭대기에 대나무가 두그루 솟아 있을 것이다.

그곳에다가 절을 짓도록 하라 의상대사는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합장을 하고 굴 밖으로 나와 산위로 올라 가보니 과연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나 있었다.
그는 이곳이 참으로 관음진신께서 머무르시는 곳임을 확인하고는 그 곳에 터를 닦고 절을 지었다.

이 절이 바로 관음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지금의 강원도 양양 낙산사(落山寺)이다 의상대사는 낙산사를 창건한 후 관세음보살님의 소상(塑像)을 조성하여 법당에 모셨는데 그 원만하고 아름다운 상호가 꼭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그러자 대나무는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 뒤, 원효(元曉)대사가 관음진신을 친견하기 위하여 이 곳 낙산사를 찿아왔다 처음 원효대사가 남쪽 동구 밖에 이르렀을 때였다 .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농담삼아 그 여인에게 벼를 좀 달라고 하자 그 여인도 흉년이 들어서 쭉정이 밖에는 없다고 농담 삼아 말 하였다.원효대사는 좀 언짢았다 다시 원효대사는 그 곳을 지나 낙산사 쪽으로 가다가 다리가 놓인 시냇가에 이르렀다.

다리 밑에서 한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그여인 곁으로 다가가서 물 한 모금을 청하였다. 그런데 그여인은 깨끗한 물을 떠 주는 것이 아니라 빨래를 헹군 더러운 물을 떠 주는 것이었다.

원효대사는 몹시 불쾌하여 망설일 것도 없이 얼른 그물을 버리고 위에서 다시 맑은 물을 떠서 마셨다. 바로 그 때였다. 들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에서 푸른 새 한 마리가 지저귀면서 말했다. 제호(醍호,훌륭한 음료수)를 버리다니, 화상은 관음보살 친견은 단념하시오," 그 소리를 들은 원효대사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다보니 새는 간 곳이 없고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새가 울던 그 소나무 아래에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원효대사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목적지인 낙산사에 도착하여 법당으로 들어가 관세음보살님께 합장하고 절을 하려는데, 관음보살상의 좌대 아래에 또 한짝의 신발이 떨어져 있는게 아닌가?

이에 원효대사는 비로소 앞서 만났던 두여인이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새가 울었던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 하였다.
원효대사는 또 전에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던 굴 속으로 들어가 다시 관세음보살님을 친견 하고자 했으나, 풍랑이 너무 심하여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원효대사는 끝내 다시는 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삼국유사)권3 -----------

- 강화 보문사 관세음보살의 영험

강화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남해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관음기도 도량이다 이곳을 구경하고 돌아오다가 거센 풍랑을 만났으나 관음기도 공덕으로 간신히 살아난 이야기가 있다 일제 때의 일이다,

근대 우리나라 불교계의 석학 중에 유명한 권상로(權相老)박사가 있다. 이분은 원래 스님으로서 훗날 동국대학교 총장까지 지냈던 분인데 이분의 친척으로서 경북 선산군 해평에서 면장까지 지낸 우용택(禹龍擇)이라는 분이 이었다.

이 분이 어느 해 가을, 친구 몇 사람과 더불어 강화도 구경을 가게 되었다.
그들은 강화도의 명소인 마이산과 전등사 등을 구경한뒤 마지막으로 관음기도 도량으로서 유명한 강화 보문사를 구경하지 않을수 가 없었다.

그들은 삼산 나루터에서 목선을 타고 보문사에 도착하여 "굴법당 마애관음" 등을 구경한뒤 다시 배를 타고 인천으로 향하였다.그런데 인천으로 가던 중에 멀쩡하던 하늘에 갑짜기 시커먼 먹구름이 뭉치더니 빗줄기가 쏟아지면서 돌풍이 일기 시작하였다.

배는 거센 풍량에 흔들리면서 기우뚱 기우뚱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배를 탄 사람들은 모두 당황해 어쩔줄 몰랐다. 게다가 산더미 같은 파도가 계속 배를 때리자 배는 곧 부서질듯 '우지직 우지직,하였으며 갑판위로 바닷물이 쉴새없이 넘쳐 들어 왔다.

우용택의 일행을 비롯하여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정신을 잃었다.그 중에는 살아 보려고 배를 붙잡고 안간힘을 쓰는사람,마냥 정신없이 '엉엉'우는 사람 등 갖가지였다.

그런데 이처럼 급박한 상항이 전개되고 있는데,어디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간절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승객 중 한 사람이 거의 무아지경에 이른 상태로 오로지 "관세음보살"만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 풍량에서 살아 남기를 바란다면 모두들 한마음으로 '나무 관세음보살,을 부르십시오 .그리고는 또다시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이 곳 강화에는 낙가산 보문사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험 있는 관세음보살님이 계시니 우리가 정성을 다하여 모두 함께 관세음보살님을 부른다면 반드시 그 묘지력에 의하여 살아 돌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 끝나자 불교를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모두 동시에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 하였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이것 저것 가릴 사항이 아니었다.

배 안은 갑자기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합장 소리로 가득 하였다. 사실, 우용택과 그 일행은 유생 이었다. 한번도 불러본적이 없는 "관세음보살"을 부르자니 선뜻 입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머뭇거리고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부르라고 하던 그사람이 우용택을 향하여 말 하였다.

"노형,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 십시오.그러면 필히 관세음보살님의 가피가 있을 것이니 어서 속히 부르십시오" 워낙 위기일발의 상황인지라 우용택 역시 '관세음보살,을 부르기 시작 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풍량은 심하게 몰아쳤다. 배는 곧 가라앉을 듯 더욱더 기우뚱기우뚱 하였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악,하고 절규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도 정신이 들면 모두들 그승객을 따라 더욱더 소리높여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이 때 기적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높은 곳에 앉아서 "관세음보살"을 선창하고 있던 그 승객이 벌떡 일어 나더니 우용택을 향해 하늘을 가리켰다 '저것 보시오." 우용택이 그의 손짓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니 오색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비치면서 그 속에서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님의 모습이선명하게 현신한 것이었다.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은'이젠 살았구나'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순간에 또다시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배를 때려 돛대를 부러 뜨렸다.

모두들 또 한번 '악'하고 절규의 소리를 질렀다 '아'이젠 정말 죽었구나. 관세음보살의 신통력도 별수 없구나.' 우용택도 이렇게 생각 하면서 너도 나도 살 궁리를 하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돛대가 부러진 뒤로는 그렇게 거세던 풍량도 점점 약해지고 빗줄기도 가늘어지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해가 나고 바다는 거의 평소처럼 정상이 되었다.
배는 폭풍을 만나 몇군데 부서진 곳이 있었으나 운행에는 큰 지장이 없었고 여러 사람들이 물을 퍼내고 힘을 합하여 무사히 인천항에 도착 하였다.

그야말로 몇시간 사이에 생사의 갈림길을 왕래 하다가 간신히 죽음에서 살아 난 것이었다. 그 후 관세음보살님의 영험에 감탄한 우용택은 고향으로 돌아가 선산 도리사의 신도가 되었으며,자신은 물론 가족들도 모두 관세음보살님을 열심히 믿게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당시 보문사에 와서 자주 관음기도를 올렸으며, 우용택과 친척간이었던 권상로 박사가 김대은 스님께 이야기하여 (관음신앙)에 수록하였던 것을 다시 정리 한 것 이다.

"만약 큰 물결에 떠내려 간다고 할지라도 한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곧 얕은 곳으로 이르게 되는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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