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스님─허공을 빨아들인 나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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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불사 댓글 0건 조회 938회 작성일 14-06-04 15:05본문
⊙허공을 빨아들인 나의기도⊙
-일타스님-
나는 젊은 시절,
수도 생활의 장애를 극복하고 힘을 얻기 위해 세 번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 첫번째는 6·25 전쟁이 일어나 피난길에 올랐던 22세 때의 일입니다.
20대 초반 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나는 대학에 진학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 면(面)에 대학생이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던 시절이었고, 우리나라에 대학교도 몇 개 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내가 당시에 그토록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출세나
명예욕 때문이 아니었습니 다.
'그동안 한문 공부를 하여 어느 정도 문리(文理)가 터졌으니
이제부터 현대학문을 배우 자 그래서 순전히 한문으로만 이루어진
불교경전을 현대적으로 풀이하고 해석한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이랴.'
이렇게 생각한 나는 서울 동국대학의 입학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로 향했는데, 때마 침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그
만 안양에 서 인민군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아지트인 동굴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 꼬치 꼬치 캐물었습니다.
"너는 뭐하는 사람이냐?"
"중입니다. "
"중이 뭐냐?"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닦는 사람이오."
"이거 순 부르주아 아니야? 인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무위도식하는
족속들 아니야?"
그들은 점점 거칠어지면서 무지막지하게 대하였고,
나는 묵묵히 있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는 잡히는 젊은이들을 모조리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고 가서 총알받이로 세울 때였습니다.
'아, 이거 잘못 걸려도 크게 잘못 걸렸구나.
이제 꼼짝없이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죽게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 정치공작대원인 듯한
말쑥한 사람이 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당시 정치공작재원들은 학식도 있고 나름대로 교양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뽑았 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를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이구만. 팔뚝 좀 걷어 보지!"
그래서 옷을 걷어 팔뚝을 내보였더니 단번에 얼굴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연비 자국이군요. 나도 불교신자요."
그러면서 내 팔뚝을 조심스럽게 만지더니 꿇어앉아 있던
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의자도 갖다 주고,
그 당시만 해도 귀했던 사이다까지 대접하였습니다.
그리고 통행증을 하나 써 주면서,
'어디든지 가다가 인민군들이 잡으면 이 통행증만
보여 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차를 태워 드리겠다면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트럭이 한 대 오자 명령을 내렸습니 다.
"이 스님 가시는 데까지 잘 모셔 드려라."
그 연비 덕분에 안양에서 김천까지 편안하게 차를 타고 내려온 다음,
진주 집현산에 있 는 응석사(凝石寺)로 걸어서 갔습니다.
응석사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지친 상태였는데,
다행히 주지스님이 쌀밥 한 사발과
반찬으로 간장 한 종지를 주었습니다.
나는 한 종지의 간장을 모두 밥에 부어 싹싹 비벼서,
사흘 굶은 사람처럼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밥그릇을 비우자마자 주지스님이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는 주민증도 병적계도 없었기 때문에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여차하면 붙잡혀서 총 알받이
노릇을 하거나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라고 해도 떠나지 않자 주지스님의 마음도 바뀌었습니다 .
"그렇다면 공양주(供養主) 소임을 맡아라."
"예."
나는 열심히 밥을 짓고, 설거지도 아주 깨끗이 했습니다.
주지스님은 만족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
"공양주 노릇, 아주 잘하는구먼."
며칠이 지나자 불공이 아주 많이 들어왔습니다.
주지스님은 나에게 불공 올리는 일을 거들 것을 명하였고,
독경을 남 못지 않게 하였던 나는 목탁을 치면서 유창하게
염불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공양주를 그만두고
부전(불공 드리는 직책)을 보라고 하였습니 다.
얼마 동안 부전을 보다가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생에 대한 애착을 끊고,
무상대발심(無上大發心)을 하여 대도인이 되어야 한다.
기도를 하자. 기도를 하여 힘을 기르자.
7일을 기한으로 정하고 옴마니반메훔 1도를 하되, 잠을 자지 말자.
이렇게 결심하고 나는 부지런히 기도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앉아서 하다가 졸음이 오기 시작하자 서서 옴마니반메훔을
외웠습니다. 그러나 졸음은 정말 참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깜빡깜빡 조는 사이에 목탁은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
발등을 찧었습니다. 몇 번 발등을 찧고 는 '
서서 하는 것도 안되겠다'싶어 마당을 돌아다니며 염불을 했습니다.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
끊임없이 옴마니반메훔을 찾고 비몽사몽간에도 옴마니반메훔을 찾다가
6일째 되는 날, 은행나무 밑의 평상에 잠깐 앉았는데 그 즉시
은행나무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버렸습니 다.
순간, 허공 전체가 나의 입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황금대왕이 자기가 들고 있는 병 속으로
무엇이든 '들어오너라' 하면 확 빨려 들어가듯이,
허공이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꿈에서 깨어나자 그토록 기도를 방해하던 졸음도 저절로
사라져서 7일 기도를 잘 마칠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찾아온 마을 이장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주민증이 없는 것을 알고 만들어다 주었으며,
기도를 잘 마친 나는 더욱 도심을 발하여 정진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힘을 얻게 되고,
생각하지도 않은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부디 수행을 하다가 뜻과 같이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러한 때에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다시금 마음을 굳게 가지고 기도를 하게 되면 힘이 샘솟게 됩니다.
기도로써 시련을 극복하여 불보살님께로,
그리고 불보살의 경지로 더욱 가까이 다가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의 기도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와 같을 때는 거듭 거듭 기도하여 도심(道心)이
걸림 없을 때까지 행하여야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경우가 나 의 두번째, 세번째 기도입니다.
-일타스님-
나는 젊은 시절,
수도 생활의 장애를 극복하고 힘을 얻기 위해 세 번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 첫번째는 6·25 전쟁이 일어나 피난길에 올랐던 22세 때의 일입니다.
20대 초반 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나는 대학에 진학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 면(面)에 대학생이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던 시절이었고, 우리나라에 대학교도 몇 개 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내가 당시에 그토록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출세나
명예욕 때문이 아니었습니 다.
'그동안 한문 공부를 하여 어느 정도 문리(文理)가 터졌으니
이제부터 현대학문을 배우 자 그래서 순전히 한문으로만 이루어진
불교경전을 현대적으로 풀이하고 해석한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이랴.'
이렇게 생각한 나는 서울 동국대학의 입학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로 향했는데, 때마 침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그
만 안양에 서 인민군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아지트인 동굴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 꼬치 꼬치 캐물었습니다.
"너는 뭐하는 사람이냐?"
"중입니다. "
"중이 뭐냐?"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닦는 사람이오."
"이거 순 부르주아 아니야? 인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무위도식하는
족속들 아니야?"
그들은 점점 거칠어지면서 무지막지하게 대하였고,
나는 묵묵히 있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는 잡히는 젊은이들을 모조리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고 가서 총알받이로 세울 때였습니다.
'아, 이거 잘못 걸려도 크게 잘못 걸렸구나.
이제 꼼짝없이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죽게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 정치공작대원인 듯한
말쑥한 사람이 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당시 정치공작재원들은 학식도 있고 나름대로 교양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뽑았 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를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이구만. 팔뚝 좀 걷어 보지!"
그래서 옷을 걷어 팔뚝을 내보였더니 단번에 얼굴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연비 자국이군요. 나도 불교신자요."
그러면서 내 팔뚝을 조심스럽게 만지더니 꿇어앉아 있던
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의자도 갖다 주고,
그 당시만 해도 귀했던 사이다까지 대접하였습니다.
그리고 통행증을 하나 써 주면서,
'어디든지 가다가 인민군들이 잡으면 이 통행증만
보여 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차를 태워 드리겠다면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트럭이 한 대 오자 명령을 내렸습니 다.
"이 스님 가시는 데까지 잘 모셔 드려라."
그 연비 덕분에 안양에서 김천까지 편안하게 차를 타고 내려온 다음,
진주 집현산에 있 는 응석사(凝石寺)로 걸어서 갔습니다.
응석사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지친 상태였는데,
다행히 주지스님이 쌀밥 한 사발과
반찬으로 간장 한 종지를 주었습니다.
나는 한 종지의 간장을 모두 밥에 부어 싹싹 비벼서,
사흘 굶은 사람처럼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밥그릇을 비우자마자 주지스님이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는 주민증도 병적계도 없었기 때문에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여차하면 붙잡혀서 총 알받이
노릇을 하거나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라고 해도 떠나지 않자 주지스님의 마음도 바뀌었습니다 .
"그렇다면 공양주(供養主) 소임을 맡아라."
"예."
나는 열심히 밥을 짓고, 설거지도 아주 깨끗이 했습니다.
주지스님은 만족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
"공양주 노릇, 아주 잘하는구먼."
며칠이 지나자 불공이 아주 많이 들어왔습니다.
주지스님은 나에게 불공 올리는 일을 거들 것을 명하였고,
독경을 남 못지 않게 하였던 나는 목탁을 치면서 유창하게
염불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공양주를 그만두고
부전(불공 드리는 직책)을 보라고 하였습니 다.
얼마 동안 부전을 보다가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생에 대한 애착을 끊고,
무상대발심(無上大發心)을 하여 대도인이 되어야 한다.
기도를 하자. 기도를 하여 힘을 기르자.
7일을 기한으로 정하고 옴마니반메훔 1도를 하되, 잠을 자지 말자.
이렇게 결심하고 나는 부지런히 기도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앉아서 하다가 졸음이 오기 시작하자 서서 옴마니반메훔을
외웠습니다. 그러나 졸음은 정말 참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깜빡깜빡 조는 사이에 목탁은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
발등을 찧었습니다. 몇 번 발등을 찧고 는 '
서서 하는 것도 안되겠다'싶어 마당을 돌아다니며 염불을 했습니다.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
끊임없이 옴마니반메훔을 찾고 비몽사몽간에도 옴마니반메훔을 찾다가
6일째 되는 날, 은행나무 밑의 평상에 잠깐 앉았는데 그 즉시
은행나무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버렸습니 다.
순간, 허공 전체가 나의 입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황금대왕이 자기가 들고 있는 병 속으로
무엇이든 '들어오너라' 하면 확 빨려 들어가듯이,
허공이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꿈에서 깨어나자 그토록 기도를 방해하던 졸음도 저절로
사라져서 7일 기도를 잘 마칠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찾아온 마을 이장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주민증이 없는 것을 알고 만들어다 주었으며,
기도를 잘 마친 나는 더욱 도심을 발하여 정진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힘을 얻게 되고,
생각하지도 않은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부디 수행을 하다가 뜻과 같이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러한 때에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다시금 마음을 굳게 가지고 기도를 하게 되면 힘이 샘솟게 됩니다.
기도로써 시련을 극복하여 불보살님께로,
그리고 불보살의 경지로 더욱 가까이 다가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의 기도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와 같을 때는 거듭 거듭 기도하여 도심(道心)이
걸림 없을 때까지 행하여야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경우가 나 의 두번째, 세번째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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