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스님─“사람들을 부처님처럼 섬기도록 노력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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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불사 댓글 0건 조회 831회 작성일 14-06-04 15:05본문
“사람들을 부처님처럼 섬기도록 노력하세요”
무비스님
흥정과 수다, 고함과 욕설, 으름장과 너스레, 저주와 보비위. 우리에게 친숙한 사람의 소음이다. 인생의 절반은 이들이 매설한 말들의 지뢰밭을 조심스레 건너다녀야 한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천재지변이라도 고의로 사람을 해치는 법은 없다. 사람은 마음먹고 칼을 쥔다. 열길 물 속은 잘도 헤엄쳐 다녀도 한길 사람 속에서 빠져 죽기 십상이다. 사람은 대개 사람에 의해 횡사한다. 이렇듯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사람이지만 살리는 것도 사람이다. 남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사람은 ‘불가능’을 제집삼아 드나든다. 나무들이 발 밑의 양분을 빨아먹을 때 인간은 우주와 교신한다.
어리석은 자도 병든 자도 모두 부처님…
부처님 말씀만 정확히 통찰해도 성불할 수 있어
‘사람이 부처님이다.’ 조계종 교육원장을 지낸 범어사승가대학장 무비(無比)스님의 지론이다. “사람은 자비로 충만하고 엄청난 능력을 지닌 고귀한 존재입니다. 반면 가장 깊고 뜨거운 탐욕의 도가니에서 허우적대는 것도 사람입니다. 무명은 무명대로 지혜는 지혜대로 부처님입니다. 번뇌에 못 이기는 사람도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도 부처님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연꽃은 진흙탕에서만 핀다. 더러움 없이 연잎의 찬란함을 기대할 수 없다. “자비광명과 약육강식이 뒤엉킨 곳이 세상입니다. 인간의 빛과 어둠을 총체적으로 살피며 부처님의 삶을 찾아야 합니다.” 왜 사람이 가장 절실한 화두가 되는가.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 우리들이 사람과 부대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사람이다.
“평화롭게 살려면 우선 주변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희로애락은 대부분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 좌우되죠.” 쉽게 들떠지고 상처받는다는 건 그만큼 가깝기 때문이다. “가깝고도 먼 것이 사람이고, 결국 사람의 본질을 깨치면 연기법에 의해 삼라만상의 참모습도 꿰뚫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망쳐놓은 생태계를 물풀이 복원할 순 없는 노릇이다. 사람만이 희망이고 그렇게들 외치지만 그만큼 실망을 많이 했기에 내뱉는 스님의 탄식이다.
“떨어지는 낙엽은 무심히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앞에선 절규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존재의 실상은 공(空). 곧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이치인데, 나와 무관한 현상에 대해선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해(利害)와 연고(緣故)가 끼면 공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죠.”
관건은 마음을 맑혀 존재의 실상을 올바로 비추는 일.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깨달음을 통한 해탈, 곧 무한행복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모두 중생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한 안심(安心)법문입니다.” 자녀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뒤에야 부모가 마음을 놓는 것처럼, 알아야 안심할 수 있다. “안심은 존재의 실상을 깨우치는 데서 비롯됩니다. ‘있다’에는 ‘없다’가, ‘이다’에는 ‘아니다’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공 혹은 연기 혹은 실상입니다. 단지 숨어 있어 잘 알아채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한 칼럼니스트는 ‘유리컵이 이미 깨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사용하라’는 비유로 연기(緣起)를 설명했습니다. 깨어질 수 있기 때문에 깨지지 않을 수도 있는 도리입니다. 헤어짐이 있으므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헤어짐이 없으면 만남도 없습니다. 둘은 하나입니다. 불법의 세계에 속해 있으며 불법을 이룹니다. 이러한 법칙을 알면 어떤 헤어짐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겠죠.”
어둠도 빛이다. “촉수가 다른 전구와 같아 30촉 짜리 전구는 100촉보다 어두워 무명에 싸인 악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도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은 눈으로 보면 부처님 아닌 이가 없습니다.” 눈이 깨달았으면 손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강조사항. “사람이 부처님이므로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스님은 〈법화경〉을 경전 중의 왕으로 꼽는다. “사람 그리고 삶의 다양한 양태가 모두 부처님이자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대승불교운동의 선언서 〈법화경〉. “〈화엄경〉이 법열에 도취된 순간에 부른 격정적 노래라면 〈법화경〉은 차분한 마음으로 벼리고 벼린 가르침의 결정체”다. “〈법화경〉은 부처님이 열반을 염두에 두고 설한 생애 최후의 당부 말씀입니다.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라며 내린 법문이 바로 ‘너희들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선언입니다. 특히 수기(授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수기란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된다는 것을 보증한다는 뜻입니다. 제바달다까지 부처님의 스승이라는 수기를 받습니다.”
제바달다(데바닷타)는 부처님의 제자였으나 후에 배반한 인물로 교단의 분열을 시도했다. 심지어 마가다국 왕자를 꾀어 부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게 했으며 부처님을 살해하려 했던 패륜의 대명사다. “이 사람마저 부처님이라면 세상에 부처님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번뇌와 무명 모두 불성입니다.”
‘사람이 부처님이다’란 깨달음은 우연의 축복이 아니다. “‘진정한 불법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안고 수많은 경전, 어록, 율문을 읽고 선원에서 실참도 했습니다. 당대 모든 선지식과 동서고금 성현의 가르침도 귀담아 들었죠.” 수행과 사유로 범벅된 스님의 고뇌어린 지난날을 엿볼 수 있는 고백이다. 한편 참선과 교학을 함께 공부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 역시 말씀만을 공부해선 깨달을 수 없는 것인가.
스님은 잘라 말했다. “교학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명하다.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말씀을 정확히 깨우치면 성불합니다.” 다만 “우리 교학 연구풍토가 말씀의 본질이 아닌 문자적 의미나 개념과 같은 방편에만 골몰하는 바람에 내용이 허황해졌고, 그래서 교학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생겨난 것”뿐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분석하기 이전에 통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사교입선(捨敎立禪) 선교겸수(禪敎兼修)에서 보듯, 선과 교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다닌다. 곧 어느 한쪽을 드러내면 다른 한쪽은 깔려 죽는다. 교학을 깎아내리면 반대급부로 참선이 과장될 수 있다. 스님은 “깨달음을 너무 고원화(高遠化).신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며 “중간단계 없이 목표치만 너무 높게 잡으면 좌절한 납자들이 공부를 포기하고, 훗날 법맥이 끊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처님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닫기 위해 절에 사는 거다. 불법보다 더 훌륭한 가르침이 있다면 미련없이 부처님을 등지겠다”는 스승 탄허.성철스님의 말을 빌려 ‘근본주의’ ‘교조주의’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남방불교는 오래 전부터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므로 대승불교는 불교가 아니다’라고 얕봅니다. 하지만 대승에 통달한 사람에게 아함부 경전을 읽으라고 보채는 것은 대학생에게 유치원생이 읽는 책을 쥐어주는 격입니다. 대승불교는 최상승의 불교이자 동아시아의 심오.방대한 사상이 응축된 결실이죠.” ‘삼을 짊어지고 온 고생이 아까워 금을 발견하고도 삼을 버리고 금을 집지 못하는’ 담마기금(擔麻棄金)의 우스꽝스러움이 ‘원조’에의 집착이다.
사람사는 이야기는 계속됐다. 살다보면 ‘슬럼프’에 빠지곤 한다. 스님은 그럴수록 ‘긴 호흡’을 가지라고 주문한다. “열심히 하다보면 자연스레 벗어날 수 있더군요.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아무리 잘못돼도 파국에 이르진 않는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감인대(堪忍待)’라는 말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삽니다. 그저 ‘견디고(堪)’ ‘참고(忍)’ ‘기다리십시오(待).’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존재가 사람이다. 자유와 평등, 박애의 화신이라고 추켜세우자마자 ‘잔인함’의 영장(靈長)이 튀어나온다. 사람에 대한 절대적 긍정은 자칫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무반성적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도 있다. ‘나는 부처님이니 남을 죽여도 된다’는 궤변으로 얼룩진 사회 무질서도 걱정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만 부처님이 아니라 ‘너’도 부처님이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내가 부처님이 되려면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용서와 자비다. “인불(人佛)사상은 ‘사람이 부처님이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부처님처럼 섬겨야 한다’는 문장까지 덧붙여야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법화경〉의 깊은 뜻을 알면서도 왜곡하고 도용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무비스님
흥정과 수다, 고함과 욕설, 으름장과 너스레, 저주와 보비위. 우리에게 친숙한 사람의 소음이다. 인생의 절반은 이들이 매설한 말들의 지뢰밭을 조심스레 건너다녀야 한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천재지변이라도 고의로 사람을 해치는 법은 없다. 사람은 마음먹고 칼을 쥔다. 열길 물 속은 잘도 헤엄쳐 다녀도 한길 사람 속에서 빠져 죽기 십상이다. 사람은 대개 사람에 의해 횡사한다. 이렇듯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사람이지만 살리는 것도 사람이다. 남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사람은 ‘불가능’을 제집삼아 드나든다. 나무들이 발 밑의 양분을 빨아먹을 때 인간은 우주와 교신한다.
어리석은 자도 병든 자도 모두 부처님…
부처님 말씀만 정확히 통찰해도 성불할 수 있어
‘사람이 부처님이다.’ 조계종 교육원장을 지낸 범어사승가대학장 무비(無比)스님의 지론이다. “사람은 자비로 충만하고 엄청난 능력을 지닌 고귀한 존재입니다. 반면 가장 깊고 뜨거운 탐욕의 도가니에서 허우적대는 것도 사람입니다. 무명은 무명대로 지혜는 지혜대로 부처님입니다. 번뇌에 못 이기는 사람도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도 부처님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연꽃은 진흙탕에서만 핀다. 더러움 없이 연잎의 찬란함을 기대할 수 없다. “자비광명과 약육강식이 뒤엉킨 곳이 세상입니다. 인간의 빛과 어둠을 총체적으로 살피며 부처님의 삶을 찾아야 합니다.” 왜 사람이 가장 절실한 화두가 되는가.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 우리들이 사람과 부대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사람이다.
“평화롭게 살려면 우선 주변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희로애락은 대부분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 좌우되죠.” 쉽게 들떠지고 상처받는다는 건 그만큼 가깝기 때문이다. “가깝고도 먼 것이 사람이고, 결국 사람의 본질을 깨치면 연기법에 의해 삼라만상의 참모습도 꿰뚫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망쳐놓은 생태계를 물풀이 복원할 순 없는 노릇이다. 사람만이 희망이고 그렇게들 외치지만 그만큼 실망을 많이 했기에 내뱉는 스님의 탄식이다.
“떨어지는 낙엽은 무심히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앞에선 절규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존재의 실상은 공(空). 곧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이치인데, 나와 무관한 현상에 대해선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해(利害)와 연고(緣故)가 끼면 공을 결코 용납하지 못하죠.”
관건은 마음을 맑혀 존재의 실상을 올바로 비추는 일.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깨달음을 통한 해탈, 곧 무한행복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모두 중생의 마음을 다독이기 위한 안심(安心)법문입니다.” 자녀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뒤에야 부모가 마음을 놓는 것처럼, 알아야 안심할 수 있다. “안심은 존재의 실상을 깨우치는 데서 비롯됩니다. ‘있다’에는 ‘없다’가, ‘이다’에는 ‘아니다’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공 혹은 연기 혹은 실상입니다. 단지 숨어 있어 잘 알아채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한 칼럼니스트는 ‘유리컵이 이미 깨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사용하라’는 비유로 연기(緣起)를 설명했습니다. 깨어질 수 있기 때문에 깨지지 않을 수도 있는 도리입니다. 헤어짐이 있으므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헤어짐이 없으면 만남도 없습니다. 둘은 하나입니다. 불법의 세계에 속해 있으며 불법을 이룹니다. 이러한 법칙을 알면 어떤 헤어짐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겠죠.”
어둠도 빛이다. “촉수가 다른 전구와 같아 30촉 짜리 전구는 100촉보다 어두워 무명에 싸인 악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도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은 눈으로 보면 부처님 아닌 이가 없습니다.” 눈이 깨달았으면 손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강조사항. “사람이 부처님이므로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스님은 〈법화경〉을 경전 중의 왕으로 꼽는다. “사람 그리고 삶의 다양한 양태가 모두 부처님이자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대승불교운동의 선언서 〈법화경〉. “〈화엄경〉이 법열에 도취된 순간에 부른 격정적 노래라면 〈법화경〉은 차분한 마음으로 벼리고 벼린 가르침의 결정체”다. “〈법화경〉은 부처님이 열반을 염두에 두고 설한 생애 최후의 당부 말씀입니다.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라며 내린 법문이 바로 ‘너희들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선언입니다. 특히 수기(授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수기란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된다는 것을 보증한다는 뜻입니다. 제바달다까지 부처님의 스승이라는 수기를 받습니다.”
제바달다(데바닷타)는 부처님의 제자였으나 후에 배반한 인물로 교단의 분열을 시도했다. 심지어 마가다국 왕자를 꾀어 부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게 했으며 부처님을 살해하려 했던 패륜의 대명사다. “이 사람마저 부처님이라면 세상에 부처님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번뇌와 무명 모두 불성입니다.”
‘사람이 부처님이다’란 깨달음은 우연의 축복이 아니다. “‘진정한 불법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안고 수많은 경전, 어록, 율문을 읽고 선원에서 실참도 했습니다. 당대 모든 선지식과 동서고금 성현의 가르침도 귀담아 들었죠.” 수행과 사유로 범벅된 스님의 고뇌어린 지난날을 엿볼 수 있는 고백이다. 한편 참선과 교학을 함께 공부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 역시 말씀만을 공부해선 깨달을 수 없는 것인가.
스님은 잘라 말했다. “교학만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명하다. “부처님의 마음을 알아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말씀을 정확히 깨우치면 성불합니다.” 다만 “우리 교학 연구풍토가 말씀의 본질이 아닌 문자적 의미나 개념과 같은 방편에만 골몰하는 바람에 내용이 허황해졌고, 그래서 교학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생겨난 것”뿐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분석하기 이전에 통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사교입선(捨敎立禪) 선교겸수(禪敎兼修)에서 보듯, 선과 교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다닌다. 곧 어느 한쪽을 드러내면 다른 한쪽은 깔려 죽는다. 교학을 깎아내리면 반대급부로 참선이 과장될 수 있다. 스님은 “깨달음을 너무 고원화(高遠化).신비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며 “중간단계 없이 목표치만 너무 높게 잡으면 좌절한 납자들이 공부를 포기하고, 훗날 법맥이 끊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처님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닫기 위해 절에 사는 거다. 불법보다 더 훌륭한 가르침이 있다면 미련없이 부처님을 등지겠다”는 스승 탄허.성철스님의 말을 빌려 ‘근본주의’ ‘교조주의’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남방불교는 오래 전부터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므로 대승불교는 불교가 아니다’라고 얕봅니다. 하지만 대승에 통달한 사람에게 아함부 경전을 읽으라고 보채는 것은 대학생에게 유치원생이 읽는 책을 쥐어주는 격입니다. 대승불교는 최상승의 불교이자 동아시아의 심오.방대한 사상이 응축된 결실이죠.” ‘삼을 짊어지고 온 고생이 아까워 금을 발견하고도 삼을 버리고 금을 집지 못하는’ 담마기금(擔麻棄金)의 우스꽝스러움이 ‘원조’에의 집착이다.
사람사는 이야기는 계속됐다. 살다보면 ‘슬럼프’에 빠지곤 한다. 스님은 그럴수록 ‘긴 호흡’을 가지라고 주문한다. “열심히 하다보면 자연스레 벗어날 수 있더군요.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아무리 잘못돼도 파국에 이르진 않는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감인대(堪忍待)’라는 말을 항상 가슴에 새기고 삽니다. 그저 ‘견디고(堪)’ ‘참고(忍)’ ‘기다리십시오(待).’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존재가 사람이다. 자유와 평등, 박애의 화신이라고 추켜세우자마자 ‘잔인함’의 영장(靈長)이 튀어나온다. 사람에 대한 절대적 긍정은 자칫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무반성적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도 있다. ‘나는 부처님이니 남을 죽여도 된다’는 궤변으로 얼룩진 사회 무질서도 걱정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만 부처님이 아니라 ‘너’도 부처님이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내가 부처님이 되려면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용서와 자비다. “인불(人佛)사상은 ‘사람이 부처님이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을 부처님처럼 섬겨야 한다’는 문장까지 덧붙여야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법화경〉의 깊은 뜻을 알면서도 왜곡하고 도용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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