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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스님─관음의 가피로 목숨을 건진 한용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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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불사 댓글 0건 조회 1,176회 작성일 14-06-0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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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의 가피로 목숨을 건진 한용운 스님
(일타스님 글)


승려요 독립운동가요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스님은 1905년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관음기도처로 이름 높은 오세암(五歲庵)에서 보냈습니다.

스님은 이 오세암에서 불경을 공부하고 글을 쓰는 틈틈이, 관세음보살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1910년, 일본이 이 나라를 강제로 점령하고 국권을 찬탈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을 길 없었던 스님은 1911년 가을, 행장을 수습하여 표연히 만주로 떠났습니다.
스님은 만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그 곳에 사는 우리 동포들을 만나 막막한 나라의 앞길을 의논하고 서로를 위로하고자 했습니다. 간도지방에 도착한 스님은 동포들을 만나 이역(異域)의 생활을 묻기도 하고 고국의 사정을 전하기도 하였으며, 그 곳의 독립지사로 협력하여 동포를 보호할 방법과 독립운동의 방향등을 의논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족투사를 양성하는 의병학교를 순방하여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깨우쳐 주고 또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통화현(通化縣)에 갔을 때입니다.
그곳은 이상한 불안이 감격과 희망속에 뒤범벅된 묘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습니다. 조밥으로 연명하면서도 밤이면 관솔불을 켜 놓고 천하 대사를 논의하는 한편, 화승총을 가지고 조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본국에서 온 사람에 대해 처음에는 불안으로 감시했고, 그 다음에는 의심으로, 마침내는 목숨을 빼앗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어찌된 영문인지 한용운 스님도 그 곳에서 정탐꾼의 혐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만주 통화현에서도 한참을 들어간 두메산골에서 자고 나오는데, 스님을 바래다 준다며 20세 전후의 한국 청년 3인이 따라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길은 차츰 산골로 접어들었고, 일행은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우거져 대낮에도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고, 길이라고는 풀섶에 나무꾼들이 다니는 미로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스님의 뒤를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총을 쏘았습니다. 순간 귓전이 선뜩함을 느꼈고, 연이어 두번째 총소리가 나자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또 한 방의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때 스님은 그들을 돌아보며 잘못을 호령하고자 목청껏 소리를 질렀으나, 성대가 끊어졌는지 혀가 굳어졌는지 전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는 할 말을 다했는데 말소리를 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동시에 피가 댓줄기처럼 뻗쳤고 격렬한 아픔이 전신을 휩쓸었습니다. 그러다가 심한 통증이 사라지면서 지극히 편안한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지금이 생(生)에서 사(死)로 넘어가는 순간이구나. 이제 죽는구나.' 이윽고 편안한 감각까지 사라지면서 스님은 완전히 혼절하여 죽음의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행했던 신앙이 환체(幻體)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바로 관세음보살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 아름답구나. 기쁘구나.' 앞이 눈부시게 환해지면서 절세의 미인,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어여쁜 여인이 섬섬옥수에 꽃을 쥐고 누워 있는 스님을 향해 미소를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총을 맞고 누워 있는 사람에게 미소를 던지다니!' 순간 스님은 달콤하면서도 분한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그때 관세음보살께서 꽃을 던지며 말했습니다. "네 생명이 경각에 있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느냐?" 그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린 스님은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니 날은 어두웠고 피는 도랑이 되어 흘렀으며, 총을 쏜 청년 가운데 한 명은 짐을 조사하고 다른 한 명은 확인 살인을 위해 큰 돌을 들고 스님을 내리치려고 했습니다.

스님은 황급히 일어나 그 자리를 겨우 피하고, 피를 철철 흘리며 오던 길로 되돌아갔습니다. 핏자국을 보고 뒤쫓을 그들이 자신들의 마을 쪽으로 가면 안심하고 천천히 쫓아올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이렇게 한참을 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어떻게 넘었는지도 모르게 산을 넘어 청(淸)나라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갔습니다.
그 곳의 마을사람들은 마침 촌장(村長)집에서 계(契)를 하고 있는데, 피를 흘리며 들어오는 스님을 보고 지혈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 때 총을 쏜 청년들이 쫓아왔고, 스님은 그들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총을 쏠테면 쏘아라." 그들은 어쩐 일인지 총을 쏘지 않고 달아났으며, 스님은 귀 뒤와 몸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받아야 헹습니다.

의사는 "매우 아플테니 마취를 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스님은 굳이 마다하였습니다. 생뼈를 깎아내는 소리가 빠각빠각 나는 수술인데도 스님은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끝까지 견뎠습니다. "이 사람은 인간이 아니고 활불(活佛)이로다." 치료를 다 마친 의사는 감탄하여 치료비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용운 스님은 평소 관세음보살을 깊이 섬겼기 때문에 절대 절명의 순간에 이르러 큰 가피를 입었던 것입니다. 이후 스님은 불교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면서 초인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신력의 힘이 아니라, 총을 맞은 그때 관세음보살의 가피 아래에서 생사를 초월한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한용운스님의 경우처럼 평소의 섬김이 위기를 구하고 업을 녹이는 근원적인 힘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우리 모두 올바른 마음으로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혜암 큰스님이 직접 겪으신 관음 가피력

이 이야기는 혜암 큰스님께서 직접 하신 이야기입니다. 여기 혜암 큰스님은 얼마전 열반에 드신 종정스님이 아니십니다. 근대 선종사에 큰 획을 긋고 오래전에 열반에 드신 큰 스님이십니다.

간단히 혜암스님에 대해 말씀드리고 글을 쓰고자 합니다. 혜암스님은 1886년에 황해도에서 3대독자로 출생하셔서 1900년 15세때 보암스님을 은사로, 금운스님을 계사로 득도하셨다 합니다.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으셨으며, 1984년 100세의 고령으로 미국 서부에 있는 능인선원의 봉불식에 참석, 대한항공 역사상 가장 고령 탑승객으로 기록되기도 하셨습니다.
1984년말에 설립된 덕숭총림의 초대방장으로 초대 되셨으며 1985년 101세(법랍89세)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신유년 여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혜암스님) 금강산 마하연에 있을때의 일이다. 대중이 몹시 웅성거려 나가보니, 얼굴이 잘생긴 어떤 청년이 목에 연두창이 터져 피고름과 함께 마치 송장이 썩는 것처럼 냄새가 지독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를 보고 "병원에 입원이나 하지 그 몸으로 뭐하러 다닙니까?" 하니 "예 제 직업이 바로 의사입니다. 영국에서 <곱살바>라는 부인이 공부를 시켜 그분을 모시고 병원을 경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병이 생긴뒤로 나는 물론 그 부인도 병을 고칠 수없어 이제는 완전히 체념하고 폐인으로 떠돌아 다닌 실정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기독교에 이런 말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 환자가 기독교인이였는 듯함) 부처님 말씀에는 <한정된 목숨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병에 걸린 것은 신심이 철저하고 독실하면 고칠 수 있다.> 하였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해 보겠습니까?" 하니, 그는 "이미 버린 목숨이니 하다가 죽어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그를 스님으로 만드니 대중스님네는 냄새 때문에 같이 못있겠으니 데리고 나가라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그런 비방과 구설을 다 참고 내 방을 비워주면서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대로 살기 틀렸으니, 일심으로 <관세음 보살>을 지성껏 불러라. 병을 고치고 못 고치는 것은 오직 그대 정성과 결심에 달렸다." 고 일렀다. 한동안 나는 그의 동정을 살펴 보았다. 그는 밤을 새워 가며 눕지도 아니하고 오직 일념으로 <관세음 보살>만 부르고 있었다.

나는 이 사람은 반드시 병을 고칠 수 있겠다고 생각 했다. 한 반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꿈을 꾸었다. 소복으로 단장한 젊은 부인이 어린애을 안고 있는데 그 애는 자꾸만 <아미타불>을 부르고 있었다. 꿈 속에서도 하도 신기하여 "어쩌면 저렇게 어린애가 염불을 잘 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더니, 그 부인이 "왜 귀찮게 구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부인에게 다가가서 그 병을 고쳐 주십사 하고간청을 하였다.
그때 그 부인은 손가락으로 그의 목을 꼭 눌렀다. 그러자 마자 달걀 같은 것 두개가 목에 축 늘어져 달려 있는 것 같았다. 부인은 가위로 그것을 자르려 하였다. 그러자 그가 말 하기를 "그 가위를 잘 소독하고 잘라 주십시오"하니 부인은 "너는 지금까지 의사 하던 버릇으로 그런 소리를 하지마는, 이 가위는 원래 독이 없는 것이다." 하고, 그 혹 같은 것을 잘라 주었다.

그는 다시 "이 겨드랑의 것도 잘라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그것은 아직 그대로 두어라." 하였다. 그리고는 이내꿈을 깨었다. 그뒤로 그 종기는 피고름이 차차 멎고 병이 아주 나았다. 이렇게 병을 고친 그는 내 첫 상좌로 법명은 동일(東日)로 지금은 이북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영험담은 밀알 출판사에서 나온 "벼랑끝에 서서 길을 묻는 그대에게"라는 큰스님의 법문책에 나와있는 글입니다.

혜암 큰스님의 오도송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어묵동정> 한마디 글귀를 누가 감히 손댈 것인가. 내게 말도 침묵도,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여의고 한마디 이르라면, 곧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 하리라. ------------------



- 관세음보살님의 중매

근세 조선 순조 7년(1819)때의 일이다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에 몹시 가난한 집이 있었다. 이 집에는 나이가 30 살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한 윤덕삼(尹德三) 이라는 노총각이 있었는데 70 을 넘은 부모를 모시고 나무장사를 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매일 첫 닭이 울면 나무짐을 짊어지고 나서는데 나무장사를 할지라도 촌 사람을 상대로 할 수가 없는 까닭으로 서울장안에 들어가 도시사람을 상대로 하여야만 팔기가 쉬웠다 서울을 왕래하자면 구파발을 거쳐 서대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편리하나 서대문 거리는 경쟁이 서로 심하여 발 붙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의 서대문 밖 무학재 너머에 있는 홍제동에서 왼편으로 개천을 끼고 세검정을 향하여 넘어가기가 어려운 자하문을 넘어 들어가야만 쉽게 팔고 돌아오게 된다. 그러므로 매일같이 이길을 택하여 다녔다 농사 한마지기도 없이 춘하추동에 나무장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하다가는 만년 총각으로 장가를 들지 못하고 늙을 일을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슬퍼졌다 더우기 그는 3대 독자 외아들이였다. 만일 정말로 장가를 못가게 된다면 자손이 끊기게 되므로 부모님께 참으로 죄송한 일이었다. 윤덕삼은 이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는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별도리가 없었다.

어느날 그는 나무짐을 지고 세검정을 향하여 가는데 귀에 서투른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다리도 아프고하여 나무지게를 내려놓고 바라보니 옥천암이라는 절에서 들려오는 것있었다 .그런데 그 절 아래 개천옆에는 높이 수십척이 되는 바위가 문도 없는 편각속에 있는데 거기에는 크게 부처님의 형상을 조각한 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부처님 앞에서 수십명의 여자신도들이 스님들과 함께 향불을 피우고 제사지내듯 메를 올리고 절을 한고 있었다 >

그 전에도 이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으레 스님들이 하는 것이거니 하며 무심히 지났으나 이날은 이상하게도 의심이 생겼다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저런 것을 할까? 저렇게 하면 돌부처가 무슨 소원이라도 들어 주는 것인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똑똑한 사람도 마음데로 못하는 일을 한 걸음도 걷지 못하는 바윗돌이 무슨 재주가 있어 사람들을 도와준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과 회의에 잠겨있는 동안에 할머니들이 불공을 마치고 건너온다 덕삼은 한 노인일 향해 물었다 "저 바위에 새겨놓은 부처님은 누구며 할머니들은 무엇 때문에 거기에 대고 절을 하고 빕니까?" "이 총각 나이는 많이 먹었어도 무식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구먼 저 바위에 새긴 것은 해수관음이라는 관세음보살이신데 이 어른은 동해,서해,남해할 것 없이 모든 바다 언덕 위에 계시다는 보살님일세.

이곳은 바다는 아니지만 개천가인 까닭으로 멀리 바다에 가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인연을 맺으라고 해수관음불상을 새겨 놓았지. 그런데 영험이 대단하여 저 보살님께 정성을 들이면 틀림없이 소망을 다 이룬다네". 덕삼은 이 말을 듣고 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돌부처가 무슨 신통이 있어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겠습니까? "그것은 모르는 말.돌부처라도 그냥 바위가 아니고,부처를 새겨 모신 바위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름을 부르고, 지성으로 마음을 모아 빌면,부처의 신령이 천리 만리라도 걸림없이 오셔서 정성을 받고는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일세.

그러기에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정성이 부족하고 믿는 마음이 부족하면 그런 사람에겐 그저 돌 바위만 보이지만, 마음이 참되고 정성이 지극하면 모든 것이 모두 부처이고,드는 것이 모두 불경소리인지라. 무정한 돌도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변신해 나타나는 것일세.

그러므로 소원을 이루고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 돌부처께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의 정성과 신심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일세" "참으로 그럴까요?" "그렇고 말고. 이절에 다니는 신자가 수백명인데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못하는 사람이 없다는거야 새상에 무슨 할 일이 없어서 갖은 고생을 해가며 이 험한 산골짜기에 올라와 정성을 드리겠는가 생각을 해 보게.

그러기에 여자들은 마음이 간절해서 철저히 믿기 때문에 소원을 이루기가 쉽지만 자네같은 총각은 남자라 마음이 엇갈리어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빌어도 건성으로 빌 것이니 어려울 것일세. 그럼 난이만 가네"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는 어데론가 가버렸다 온갖 고생을 거듭하고 쪼들릴대로 쪼들린 윤총각은 귀가 번쩍 트이는 것 같았다.

그 다음날부터 그는 이 곳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길가에 나무짐을 버티어 놓고 건너가서 해수관음에게 수십 번씩 절을 하고 마음속으로 축원하였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이시여! 어서 제가 장가를 들어 자손을 보고, 부자가 되어서 나무장사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예배만으론 시원치가 않아 점심밥으로 먹을 도시락을 나무짐에서 꺼내어 가져다가 올리고 다시 절을 하였다. 도시락이라 하여도 보리밥 아니면 조밥이요 게다가 된장 덩어리가 끼어 있어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도 가난뱅이가 이러는 것은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윤덕삼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나무짐을 지고 오갈때마다 그와 같이 하였다.
이렇게 백일을 하고 나니, 비록 돌부처라고는 하지만 어머니 마냥 친해져,보기만해도 다정함을 느꼈다 이제는 부끄럼없이 처다보고 농도 하고 어리광을 부릴 수 있을것 같았고,그만하면 자기 소원도 들어 줄 만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생활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모두가 허사인듯 야속한 마음도 가끔 들었으나 자기의 정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언젠가는 자기의 소원을 들어 주리라 믿었다.그럭 저럭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날이 되었다.

그 날도 나무를 성안에 팔고 돌아오는 길에 윤덕삼은 해수관음에게 들렸다.그런데 마침 비가 쏟아져 나갈 수가 없었다 덕삼은 문도 없는 관음각에 홀로 앉아 있다가 심심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여 '우물꼬누'를 커다랗게 그려놓고 관세음보살님께 꼬누를 두는 내기를 하자고 말했다. "관세음보살님,이제 저와 같이 내기 꼬누를 둡시다. 저는 이길 자신이 있으니,만일 제가 이기면 관세음보살님이 그 댓가로 저의 소원을 들어 주셔야 합니다" 덕삼은 꼬누를 두기 시작했다.

우물꼬누란 첫 수에 이기고 지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다. 덕삼은 조약돌 두 개를 주어다가 하나는 제 것이라 하고,하나는 관세음보살님 것이라 몫을 정해 놓고,혼자 천진스럽게 두었다. "그럼 제가 먼저 두겠습니다" 첫 수에 관세음보살님을 이겨 버렸다.그리고 관세음보살님을 우러러 보면서 기원드렸다. "관세음보살님! 분명히 보셨지요? 꼬누는 분명 제가 이겼습니다.
그러니 내일이라도 속히 저의 소원을 꼭 성취시켜 주셔야 합니다" 덕삼은 이렇게 말을 하고 비가 그치자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꿈에 거룩하게 생긴 늙은 부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해수관음을 모시고 있는 옥천암에서 온 보살이다. 너의 정성이 하도 갸륵하여 너에게 도움이 될 말을 일러 주러 왔다.
너는 내일 첫 새벽 닭이 울 때에 나무짐을 지고 떠나서 밤이 새기 전에 자하문 밖에 가서 기다리고 있거라. 그리하여 문이 열리면,첫번째로 나오는 여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거라. '남녀가 유별한데 먼저 말하기는 미안하지만,어디로 가시는 누구이신지는 모르지만 가시는 곳을 가르쳐 주시면,제가 안내하여 줄테니 저를 따라 오십시오'라고 이야기 하고 그를 너의 집으로 인도하면 너의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 꿈속일망정 덕삼은 하도 좋아 "고맙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다짐을 나누며 깨어 보니 분명한 꿈이었다.

윤덕삼은 곧 이어 뒷집에서 첫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자 바뿌게 옷매무새를 고치고 밖으로 나왔다 나무 짐을 지고 집을 나오려 하자 어머니가 물었다 "애야,오늘은 먼동도 트지 않았는데 벌써 나가느냐?" "네,오늘은 누구를 일찍 만나야 하기 때문에 일찍 나갑니다" 빈 속에 나무 한 짐을 지고 바뿐 걸음으로 삼십리를 걸어 자하문 밖까지 올라가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희망에 들뜬 몸이므로 배고픈 것도 무거운 것도 다 잊고 단숨에 자하문 밖에 이르러 나무짐을 괴어 놓고 보니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행으로 여기고 먼동이 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 틈으로 하얀 버선을 신은 발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관세음보살님이 거짓말은 하지 않으셨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있는데 마침 문이 열렸다.제일 먼저 보자기로 싼 것을 머리에 인 여자가 쏜살같이 세검정으로 내려갔다.

덕삼은 나무짐과 지게를 버리고 종종걸음으로 쫓아 내려가 소매를 붙들고 꿈 속에서 일러주신 대로 하였다 "놀라지 마십시요.남녀가 유별한데 먼저 붙잡고 말하기는 실례인 줄 아오나 어디로 가는 낭자이신지 제가 길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새침하게 톡 쏘고 말대답도 하지 않을 줄 알았던 그 어여쁜 낭자는 뜻밖에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저는 윤도령이란 총각을 만나려 갑니다" 윤덕삼은 너무나도 뜻밖이라 눈이 휘동그래져서 물었다. "제가 윤총각인데요? "네? 그러세요. 저는 심낭자입니다.그런데 어떻게 알고 나오셨나요?" "이리 오실 줄 알고 마중 나왔습니다.간 밤의 꿈에 어떤 점잖은 부인이 나타나 말씀하시길,'너는 장안에 있는 낭자를 만나게 될터이니 잘 보살펴주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첫 닭이 우는 새벽 마중을 나오게 된 것입니다." 제게도 그런 부인이 간밤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길 "네가 자하문을 나가면 첫번째로 어떤 사나이를 만날 터인데 그는 윤도령이라는 총각이다.
그는 심덕이 좋아 따라가도 해롭지 않을 것이니 따라 가거라" 하시길래 그 말씀을 기억하여 여기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꿈이 같을 까요?" "그게 다 천생연분인 까닭입니다" "아이 망칙해라" "망칙하기는 무엇이 망칙합니까? 세상 만물에는 다 임자가 있고,짝이 있는 법인데..." 두 사람은 초면같지 않게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나란히 내려왔다. 어느덧 절 가까이 왔다.

"여기서 잠깐 쉬어 갑시다" 덕삼은 심낭자를 관세음보살상 앞으로 인도했다 "자,우리 오늘의 일을 감사하기 위해 부처님께 절을 먼저 합시다" 절을 하려고 관세음보살님 앞에 선 심낭자는 깜짝 놀랐다 "어머나! 이분은 간밤의 꿈에 뵙던 분과 얼굴이 꼭 같습니다" "그래서 절을 하자고 한 겁니다.우리의 인연은 관세음보살께서 맺어주신 것입니다" 덕삼은 몇 번이고 절을 하며, 감격하여 어쩔 줄 몰랐다. "감사하니다.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님!" 그런데 심낭자는 어찌된 사람인가? 그녀는 명문대가의 규수로 열여덟 살에 어떤 양반의 집으로 출가하였다.그러나 연분이 아니 였는지 신랑이 혼례 즉시 보기 싫다고 퇴박을 하였다.
그리하여 3년을 기다리다 견디다 못해 친정으로 돌아와 7년,10년을 동안을 수절하며 남편의 개심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소식도, 희망도 없었다.
그러니 말만 시집갔지 처녀나 다름이 없었고 그렀다고 평생토록 수절하며 혼자 지낼 수도 없었다.

또 버젓이 개가할 수도 없는 처지라 어머니의 허락을 얻어 어디론가 아무도 모른는 곳으로 길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딸이 불쌍하기만 했던 그의 어머니는 귀중한 금,은, 보석,산호,비취 등을 한 보따리 싸주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연에 따라 마음대로 집을 떠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심낭자는 스물 여덟 살 되던 해에 길을 떠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날밤 꿈에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길 "너는 다른 문으로 나가지 말고 자하문으로 나가되, 문이 열린 후 첫번째로 만나게 되는 윤총각이라는 남자를 따라가면 행복하게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를 들은 윤덕삼은 그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실감하고 더없는 고마움과 행복을 느꼈다.윤총각은 날을 받아 일가친척을 모아 놓고 간단하게 혼례를 치루었다. 그리고 심낭자가 가지고 온 패물을 팔아 집과 논밭을 마련하고 또 산도 사서 아들 딸 낳고 평생부자로 큰 살림을 벌리니 신도면 일대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그의 후손들도 역시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근래에도 그의 5대손이 이러한 인연으로 불공기도 다니며 선조의 이야기를 전하였다.

출처/청신남 청신녀 (우리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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